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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속깊은 이야기

28년간 비극의 기록: 베를린 장벽 탈출 시도 중 최소 140명 이상 사망 🕊️

by 클라우드715 2025. 12. 28.

 

📌 들어가며

1961년 8월 13일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까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물리적으로 분단시켰습니다. 이 장벽은 단순한 콘크리트 벽이 아니었습니다. 높이 3.6m의 벽 두 겹, 155km에 걸쳐 서베를린을 완전히 감싼 순찰로, 302개의 감시탑, 경보 장치, 철조망, 14,000명의 경비병, 600마리의 경비견으로 무장된 복잡한 군사 경계 시설이었습니다.

💔 사망자 통계: 최소 140명

베를린 장벽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 결과가 존재합니다.

공식 기록 📊

포츠담 현대사 연구 센터(ZZF)는 1961년과 1989년 사이에 베를린 장벽에서 최소 140명이 사망했다고 확인했으며, 이 중 91명이 동독 국경 군인들에 의해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다양한 추정치

  • 체크포인트 찰리(분단 전 존재했던 미국 검문소) 박물관은 사망자 수를 245명으로 제시했으나, 여기에는 국경 수비대원의 자살과 탈주자와의 명확한 연관성이 없는 물에서 발견된 시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28년 동안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하다가 140명이 숨졌고, 3,00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시기별 사망률 변화 📉

장벽 희생자의 거의 86%인 120명은 1961년에서 1975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1976년에서 1989년 사이에는 19명만이 사망했습니다. 사망률이 감소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70년대 중반 기술 개선으로 장벽이 더욱 견고해짐
  • 장벽 인접 지역에 더 많은 제한 조치
  • 1975년 헬싱키 협정 서명으로 합법적 국경 통과 기회 증가

콘라트 슈만, 동독 국경경비부대 하사: 장벽 건설3일째, 동동지역에서 서독으로의 탈출, 1961.8.15

🔫 즉각 사살 명령 (Schiessbefehl)

동독 국경부대에게 내려진 사격 명령은 장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범죄자이며,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시했습니다.

명령서에는 "국경이 여성과 아이들을 동반하여 침범될 때조차도 총기 사용을 주저하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일부 경비원들은 "탈출한 난민보다 죽은 난민이 낫다"는 모토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1982년 동독은 국경에서의 즉각사살 명령을 법제화했습니다.

😢 주요 사망 사건들

1️⃣ 최초 사망자: 이다 지크만 (Ida Siekmann)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 사망자는 58살의 이다 지크만(1902-1961)으로, 1961년 8월 22일 아침 거주하던 건물 3층 창문에서 탈출을 위해 뛰어내렸다가 소방관들이 점핑 시트로 제대로 받아내기 전에 도로변에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가 사망한 날이 그녀의 59세 생일 불과 하루 전날이었다는 점입니다.

베르나우어 48번지의 건물(Bernauer Straße 48), By Willy Pragher

2️⃣ 페터 페히터 (Peter Fechter) -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

1962년 8월 17일 발생한 페터 페히터(1944-1962) 사살 사건은 당시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18세 벽돌공이었던 페히터는 친구와 함께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사건 경위 😭

페히터의 친구 쿨바이크는 담을 넘는데 성공했지만, 페히터는 담을 넘는 도중 동독군의 일제 사격을 받고 죽음의 구역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서베를린 시민 수백 명이 목격하는 와중에 그는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서독 사람들이 붕대를 던져주었으나 그에게 닿지 못했고, 약 40분 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페터는 약 1시간 동안 동독 측으로부터 어떠한 의료 지원도 받지 못했고, 서독 측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파장 🌊

페터 페흐터가 대중 앞에서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이 피를 흘리며 죽었다는 사실은 자발적인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다음 날 밤 폭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충격을 받은 서베를린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 앞에서 '살인자'를 외치며 동독을 규탄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동독 당국은 탈주자들을 사살한 직후 곧바로 시신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짐메르거리에 있는 페처 페히터 추모비에는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라고 쓰여있다.

3️⃣ 마지막 총격 사망자: 크리스 구에프로이 (Chris Gueffroy)

마지막 희생자는 크리스 구에프로이(1968-1989)라는 당시 20살 남성으로, 1989년 2월 6일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총에 맞았습니다.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9개월 전의 일이었습니다.

배경 😔

1989년 1월 중순, 동독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구에프로이와 친구 가우디안은 동독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장벽을 넘으려는 사람에게 총살하라는 상비 명령이 해제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크리스 구에프로이의 무덤, By Brewer Bob

⚖️ 통일 후 법적 처벌

독일 통일 이후 베를린 장벽 사망 사건에 대한 법적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1997년 페터 페히터를 사살했던 2명의 전직 동독군 병사가 법정에 섰습니다. 이들은 당시 50, 60대였으며, 한 방송작가가 5년이 넘게 동독 자료를 파헤친 끝에 찾아냈습니다.

구에프로이 사건의 경우, 2004년 8월 7일 재심리에서 두 명의 SED 요원이 유죄 판결을 받고 각각 15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 성공한 탈출: 열기구를 타고 자유를 향해

사망 사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놀라운 창의력과 용기로 탈출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1979년 슈트렐치크 가족의 열기구 탈출 ✈️

1979년 동독의 슈트렐치크(Strelzyk)가족은 직접 제작한 열기구를 타고 서독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놀라운 실화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왼쪽부터 귄터 베첼, 도리스 슈트렐지크, 피터 슈트렐지크, By Ken Hively, Los Angeles Times

영화화 🎬

  • 1982년 미국 월트디즈니 제작 영화 "야간월경(Night Crossing)"
  • 2018년 독일 영화 "열기구 풍선(Balloon)" - 2020년 1월 한국 개봉

탈출 과정 🎪

첫 번째 시도 (실패)

  • 1979년 7월 4일 시도
  • 1,900미터 상공까지 올라갔으나 구름에서 습기가 차 버너가 꺼짐
  • 국경 200m를 앞두고 추락하여 실패

두 번째 시도 (성공) 🎉

  • 높이 30m, 너비 20m의 더 큰 열기구 제작
  • 2,500m 상공까지 올라가 28분 비행
  • 두 가족 총 8명이 함께 서독 탈출 성공

이 사건은 평범한 시민들이 자유를 위해 얼마나 놀라운 창의력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 역사적 의의

베를린 장벽에서의 사망 사건들은 단순한 통계 숫자가 아닙니다. 각각의 숫자 뒤에는 자유를 향한 개인의 용기와 비극적 희생이 있습니다.

탈출 중 사망한 페히터를 추모하는 글귀에는 "Er wollte nur die Freiheit(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모든 희생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 맺음말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동유럽과 중앙유럽에서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세계 역사의 중추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8년간 최소 140명 이상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잃었던 베를린 장벽. 이 비극적 역사는 자유의 소중함과 분단의 아픔을 동시에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오늘도 정!말 고맙습니다! ^^